한 정신과 의사의 치매 아내 간병 기록 2019년,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배우 김혜자의 뛰어남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고, 동시에 치매 경험의 아픔과 슬픔을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 있는 어조로 전달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부터 치매 국가책임제를 진행하여 건강보험 적용, 요양급여 지급, 시설 및 병원 확충, 연구 투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치매는 이제 더는 먼 이야기가 아닌, 많은 사람의 염려이자 부담입니다.
아직 치료 방법이 없고 주변에 엄청난 부담을 끼치기에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치매. 여기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나타난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을 10년 동안 돌본 기록을 남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의 이력은 평범치 않은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남긴 트라우마를 연구하여 사회와 건강의 관련성을 살핀 의료인류학자이자, 의학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온 ‘질환 서사’(Illness Narrative)라는 책을 썼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데다가 환자와 의료인, 의학과 사회의 관계를 평생 연구한 대학자이니 아내를 돌보는 훌륭한 방법을 알고 있었을 법 싶지만, 그에게도 무척 버거운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아서 클라인먼의 ‘케어’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결국 세상을 뜬 아내를 대상으로 한 10년의 간병기와, 그 배경이 된 자신의 삶과 공부, 연구를 살핀 60년의 회고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며 상호작용하여 한 사람의 삶이 지니는 복잡성과 다면성을 보여줍니다. 간병인 클라인먼과 연구자 클라인먼은 분리되어 있지요.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하지만, 클라인먼이 현대 의학에 지닌 문제의식에 평생토록 추구한 해결책은 그가 아내를 간병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바탕이 됩니다.
‘케어’를 쓴 아서 클라인먼은 하버드의 정신건강의학과, 의료인류학과 교수로 문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여 의료인류학, 의료인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를 10년 동안 간병한 클라인먼의 기록은 돌보고 돌봄 받는 모든 이에게 깊은 울림을, 현대 의학의 차가움을 염려하는 이에게 크나큰 깨달음을 준다. 출처: 알라딘
간병에서의 어려움은 대충 짐작이 가지만, 하버드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클라인먼이 가진 문제의식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시는 건 당연합니다. 현대 의학,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환자를 잘 치료하지 못하는 것? 현대 과학기술 중 완벽한 것은 없으므로, 현대 의학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이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너무 비싸다는 것? 뒤에서 살피겠지만, 클라인먼의 주장은 분배 문제와 상당히 거리를 둡니다. 비윤리적이라는 것? 물론, 일부 비윤리적인 의사가 있음을 문제 삼지만, 클라인먼은 자신을 도덕군자로 놓고 타인의 행동을 비방하는 일을 하진 않습니다. 그는 ‘비인간적인 현대 의학’을 비판하는 의료인문학과 함께 하며, 관료주의 때문에 점점 환자와 의료인이 멀어지고 있는 현실을 통탄합니다. 그 결과, 의료의 핵심인 돌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며, 아내를 돌보면서 이를 연구 대상에서 개인의 문제로 다시 한번 심각하게 경험합니다. 이것이 의료 제도나 병원만의 문제가 아님은, 그 자신 또한 아내와 함께하면서 한 번 돌보지 못했고,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치매 아내를 돌보며 ‘돌봄’을 다시 생각하다 ‘케어’는 인상적이면서 충격적인 일화로 출발합니다. 치매로 점점 인지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아내는 어느 날,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장 나가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소리칩니다. 여기서 남편은 아서 클라인먼이고, 아내는 조앤 클라인먼, 평생의 반려자였으며 두 아이의 어머니, 한문학 연구자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입니다. 그의 총명함과 충실함, 지혜와 사려 깊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남편의 타들어 가는 마음을 묘사하면서, 클라인먼은 자신이 돌봄을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의사로서의 경험과 가족 간병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특히 후자로 보낸 고통스러운 10년 동안 나는 돌봄이란 무엇인지 뼛속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14쪽)[1] 이렇게 그는 아내와 고통스러운 10년을 경험하면서 돌봄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50대 후반, 상상하기 어려운 나이에 알츠하이머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아내. 더구나, 시각을 담당하는 영역을 먼저 침범하는 특이한 형태의 알츠하이머병은 아내의 시력을 빼앗는 것으로 출발해 점차 ‘조앤’이라는 인간을 지워나갑니다. 교수로, 연구자로, 작가로 바쁜 삶을 살고 있던 클라인먼에게 아내의 병은 그의 실존을 위협하는 위기입니다. 그는 변화에 어떻게든 적응하려 하지만, 그 삶을 더 끌고 가기 어려운 상황을 여러 번 마주합니다. “조앤의 상태는 그녀와 우리에게 다른 결과를 보여주며 악화되곤 했다. 때로는 서서히 악화되고 때로는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나빠지다가 다시 늦춰졌다가 일정 기간 동안은 정체기가 온다. 내가 이제야 해야 할 일에 대해 파악했고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또다시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찾아온다.” (61쪽) 클라인먼은 고백합니다. 알츠하이머병이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지 않”으며, “비논리적이고 예측 불가하며 가끔은 완전히 아무 일이나 닥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28쪽).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에는 구조가 있습니다. 흔히 기승전결이니 발단, 절정, 대단원이니 하는 표현이 이를 가리킵니다. 문제 또는 갈등 요소가 나타나면 이것이 점차 전개되어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여기에서 어떤 해결책이나 파국이 나타나서 해소로 이어지는 것. 그러나 우리 질환 경험은 이런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질병은 나타나고 전개하지만, 변화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뚜렷한 절정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만성질환의 과정은 사람의 진을 빼놓지요. 더구나 알츠하이머병은 계속되는 쇠락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발작처럼 터져 나오는 악화와 잠시간의 평온, 언제가 될지 모르는 절망 같은 결말. 만약 알츠하이머병의 과정과 같은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는 금방 읽기를 포기할 겁니다.
사건의 발단은 긴장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절정에 달해 문제가 터지면서 긴장 해소의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a)와 달리, 질환 서사는 질병 사건 이후 긴장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는 형태를 지닌다(b). 그 끝 또한, 어떤 해결이나 결말에 도달하는 보통의 이야기와 달리 결말이라고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계속 이어지거나(만성질환), 해소되었다고 하기 어려운 흔적을 남긴다(급성질환, 특히 외상의 경우).
이 과정을 견뎌 나가는 것이 클라인먼이 말하는 돌봄입니다. “어느 누구도 심각한 질병과 간병의 경험과 상실 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중요한 무언가를 잃지 않으며 지낼 수는 없다. 내 경험으로는 ‘인내력(endurance)’이란 단어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돌봄은 인내에 관한 일이다.” (67쪽) 이전과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 크나큰 신체적, 정신적 부담을 주는 아내를, 그 옆의 내 삶을 인내하는 일이 돌봄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버티어 나가는 과정, 그곳에서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돌봄입니다. “내가 할 일이었기 때문에 한다.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누군가를 돌보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고 어떤 꿈을 미루었고 커리어가 어떻게 달라졌고 에너지와 감정이 얼마나 소모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75쪽) 돌봄은 즐거운 일도,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일도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고통을 감내하는 일입니다. 이 고통을 견뎌야 할까요? 쾌락을 선으로 여기는 시대,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아무런 매력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클라인먼은 돌봄에서 성장을, 구원을 찾습니다. 그의 구원은 비종교적인 의미이지만, 종교적 경험과도 통함을 알려주지요. “아니 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응답하는가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이런 마음이 그 모든 세월을 구원의 경험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앤과 피터에게 나의 변화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곤 했다. ‘우리 아서가 인간이 되었지!’” (66쪽) 여전히 삶의 성숙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의미를 지니지만, 이를 약속하던 종교가 여러 이유로 힘을 많이 잃은 것도 사실입니다. 클라인먼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돌봄을 통해 성숙할 수 있으며, 그것은 개인과 주변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고. 이런 생각은 젊은 시절, 클라인먼이 막 의사 초년생이었던 때의 경험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재활 치료 센터에서 일할 때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일곱살 소녀를 만납니다. 아이는 매일 욕조에 들어가야 했고, 외과 레지던트들이 죽어가는 피부 조직을 제거하는 동안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몸이 흉터로 굳어져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었죠. 클라인먼은 아이에게 말을 걸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아는 클라인먼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고, 무능한 자신을 자책합니다. 어느날, 클라인먼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을 견디고 있냐고. 얼마나 힘드냐고.” (180쪽) 그는 이 질문이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이 대화는 아이와 진심을 나누는 통로가 됩니다. 이 경험을 몇 번씩 복기하면서 클라인먼은 말합니다. “환자가 위기에 처하더라도, 특히 환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사는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은 대체로 병과 치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다. 쉽지는 않지만 환자와 감정적·도덕적 공감을 쌓아가면서 의사와 환자를 (가족들도) 진료의 핵심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 (181쪽) 진료에서 행하는 돌봄은 환자와 의료인 모두를 삶의 진실로 인도하는 실천이자, 서로의 몫을 나누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을 지우는 효율성 대신 아픔의 이야기를 되찾는 일 클라인먼의 진단처럼,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돌봄을 잃어버렸습니다. 클라인먼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미국은 미국 의료의 문제로, 우리는 한국 의료의 문제로 인해 돌봄은 진료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어 갔습니다. 미국이 복잡한 의료보험과 소송의 회오리 속에서 점차 진료 지침을 확립, 고수하는 방식을 택하여 관료주의적 효율성을 달성해 갔다면, 우리는 외국의 의학을 국내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빠르고 효과적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하향식 위계를 통한 의료적 체계 확립을 꾀하였고, 단일보험 체계가 자신의 성공을 과신하면서 그 또한 관료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관료주의, 즉 조직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위한 조직적 체계는 당면한 과제를 지침에 따라 행하도록 관리하며, 여기에서 개인의 특수성은 무의미하거나 나쁜 것으로 취급됩니다. 이것은 의사의 어떠함과는 무관하게 환자를 표준에 따라 효율적으로 진료하기 위한 바탕입니다. “표준에 따른 효율성”은 통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매력적인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분명, 장점도 있습니다. 늘 실수하는 존재인 인간으로부터 이런 접근은 실수와 잘못을 줄여줍니다. 하지만 단점이 큽니다. 체계는 그 자신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적’인 부분을 지워나갑니다. 표준에 따른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은 자신을 지우고 체계의 부속으로서 작동해야 합니다. 클라인먼의 한탄은, 그저 병원의, 전체 의료 체계의, 전문가 집단의 부속이 되어버린 의료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서 클라인먼(왼쪽)과 조앤 클라인먼(오른쪽). ‘케어’에 담긴 내용은 이미 여러 번 지면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케어’가 특별한 이유는 아내의 사망과 애도의 시간을 보낸 클라인먼이 이 모두를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과 애도, 성숙과 성찰의 서사를 통해 책은 독자에게 아픔이란 무엇인지, 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묻는다. 출처: 피비에스[2]
그가 해결책으로 돌봄을 꺼내든 것은, 이것이 개인적·관계적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돌봄 또한 체계화할 수 있으며, 요양원에서 이뤄지는 노인 돌봄을 생각할 때 돌봄이 어떻게 현대 의료를 바꿀 수 있는가 하는 회의도 드실 겁니다. 하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클라인먼이 말하는 돌봄이란 돌봄 받는 자를 위한 돌보는 자의 헌신이며, 그를 위해 어려운 일과 상황도 견디어 내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환자-의료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모든 이에게, 즉 아픈 아이를 돌보는 부모에게, 또는 반대로 노쇠한 부모를 돌보는 자녀에게, 힘든 남매를 보살피는 다른 남매에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순간 돌봄 받는 자였으며, 어느 순간엔 돌보는 자가 됩니다. 그 보편성이, 돌봄을 다른 의료 행위와 구분합니다. 돌보는 행위 자체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자신이 돌보는 자임이, 돌보면서 쌓인 시간이 자신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시킴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치료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떠올리는 어떤 기법이나 기술, 또는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료에 임하는 나는 누구인가, 내 앞에 있는 돌봄 받는 자와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처하는가, 이 관계로 인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와 같은 질문에 반복적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내면 성장의 방식입니다. 이런 생각이 지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병원에 다녀오고 치료를 받는 것이 무척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선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일인 것처럼 취급받기 때문이죠. 아프고 낫는 이 과정은 그저 치워버릴 짐이었을 뿐, 단 한 번도 개인과 관계의 역사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아픔이든, 가족의 아픔이든, 심지어 환자의 아픔이든 간에, 아픔의 시간은 그저 잊어버려야 할 끔찍한 기억이기만 할까요. 그것은 삶이라는 하얀 천 위에 떨어진 지워버려야 할 얼룩인 걸까요. 그 시간은 마땅한 대접을 받을만한 시간은 아닐까요. 클라인먼이 말하는 돌봄이란, 그 아픔의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외침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정리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만한 시간이죠. 즉, 돌봄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삶이라는 이야기 속 중요한 챕터 하나를 어떻게 만들어나갈까에 관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아픔의 시간을 이야기로 만들고, 함께 나누는 것이 지니는 가치를 클라인먼의 ‘케어’는 보여주고 있지요. 여러분의 아픔은, 어떻게 갈무리되어 나눠지고 있는지요?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아서 클라인먼. 노지양 옮김. 케어. 시공사; 2020. Abernethy B. Arthur Kleinman on Caregiving. PBS [Internet]. Oct 1, 2010 [cited at Jun 22, 2020]. Retrieved from: https://ift.tt/2zVmZb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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