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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국책연구기관에 다니는 A박사가 기자에게 말했다. 넘사벽. ‘넘지 못할 사차원의 벽’의 줄임말로 격차가 큰 압도적 상대를 뜻한다.
누가 그렇다는 건가. 미국과 중국이다. 뭘 넘지 못하나. 과학 기술력이다. 한국의 과학 기술 경쟁력이 세계에서 어디쯤인지 묻자 A박사가 “일단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은….”이라고 답했다. 말을 끊고 왜 미국과 중국을 빼고 이야기하냐고 질문하자 “미·중은 ‘넘사벽”이라는 답이 돌아온 거다.
격차가 너무 커 두 나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반칙’이란 뉘앙스였다. 과거 언론에서 국회의원 재산 순위와 평균 재산을 보도할 때 압도적 1위인 정몽준 의원(현 아산재단 이사장)을 제외하고 통계를 냈던 게 생각났다.
「
"좋아. 미국은 알겠다. 그런데 중국이 그 정도라고?"
」
중국이야 항상 스스로가 최고라고 이야기하지. 그대로 믿을 수 있나? 박사의 말은 이른바 중국 경사론(傾斜論)에 취한 말 아닌가.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는 주목할만한 통계를 내놨다. 골자는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논문 수에서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1위를 했다는 거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국가별 자연과학 연구논문수 변화 통계. 미국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다.[사진 닛케이]
자세히 살펴보자.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는 연도에 따라 논문 수 변동이 커 3년 평균으로 집계했다. 중국의 2017년(2016~2018년 3년 평균) 논문 수는 30만 5927편으로 1위다. 미국(28만 1487편)을 제쳤다.
중요한 건 미·중 이외 국가 성적표다. 논문 수 3위는 독일로 6만 7041편, 4위가 일본(6만 4874편)이다. 중국, 미국과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이 ‘넘사벽’ 이란 A박사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이런 생각, 들 수 있다. 실제로 중국이 논문 수에서 미국에 앞섰다는 결과는 이전에도 여러 번 나왔다. 그때마다 물량 공세일 뿐 질에서는 미국에 비교가 안 된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많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국가별 자연과학 연구논문수 변화 통계. 미국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다(영문버전).[사진 닛케이 아시안 리뷰]
이번 결과는 좀 다르다.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는 미국 과학특허정보 조사회사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했다. 닛케이는 “이번 통계는 전문가 동료 평가 등으로 일정한 수준이 있다고 판단되는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만을 산출한 것”이라고 전했다. 일정 품질이 되지 않은 논문은 통계에서 뺐다는 거다.
중국의 첫 화성 탐사선 톈원(天問)-1호를 운반할 창정(長征)-5 Y4 로켓이 7월 23일 하이난성의 원창 우주발사장 발사대를 이륙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이를 입증할만한 다른 통계도 있다. 논문 가치는 업계 사람이 가장 잘 안다. 객관적 지표로 보면 피인용 수다. 논문이 얼마나 다른 연구자들에 인용됐는지를 나타낸 거다. 이번 조사에서 피인용 수 상위 10%의 주목도 높은 논문 점유율은 2017년 기준 미국이 24.7%로 1위, 중국이 22.0%로 바짝 쫓고 있다. 미·중 양강 체제 수치는 ‘허수’가 아니었다.
두 나라가 우위를 점하는 분야는 뚜렷하게 나뉜다. 중국은 재료과학, 화학, 공학, 수학에서 높은 점유율을 자랑한다. 미국은 임상의학, 기초생명과학이 높다.
이를 보면 미국과 중국의 과학기술 전선(戰線)도 어렴풋이 짐작된다. 향후 유망 산업 분야인 ‘바이오’를 선점하기 위해 중국이 의학과 생명과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이고, 미국은 어떻게든 우위를 중국에 뺏기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대전광역시 유성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부처 업무보고에 앞서 2월 발사예정인 인공위성 천리안2B의 축소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정세균 총리, 문 대통령,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중앙포토]
중국 과학기술 약진의 비결은 국가 차원의 투자다. 닛케이에 따르면 중국의 2018년 연구개발비는 약 58조엔(약 600조 원)이다. 미국(약 61조엔)보다 근소하게 적지만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열의는 한국도 만만치 않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 개발비는 약 86조 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5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투자비율로 보면 4.8%로 1위다. 중국도 GDP 대비 투자비율은 2020년에야 2.5%를 넘길 생각을 한다.
카이스트(KAIST) EEWS 대학원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공동 연구팀이 2015년 개발한 플렉서블 리튬이온 배터리의 모습. [중앙포토]
차이는 뭘까. 핵심은 대학이다. A박사는 “한국 과학 기술의 큰 취약점은 대학”이라고 꼽았다. 그는 비록 특정 분야지만 한국 글로벌 기업의 기술 역량은 세계와 겨뤄볼 만하다고 봤다. 하지만 대학은 몇 군데를 제외하면 연구 역량이 떨어진다고 했다.
중국은 다르다. 일본 문부과학성 통계를 보면 중국은 대학 투자에 집중한다. 2000년에서 2018년 투자 액수의 증가 폭이 10.2배였다. 같은 시기 미국은 1.8배에 그쳤다.
그래서일까. 중국에선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지역 대학 연구진이 세계적 기술을 발명하는 일이 잦다. 이를 바탕으로 창업해 스타트업으로 성공하는 사례도 많다.
과학에서도 중국의 추격과 미국의 ‘기득권’ 사수 투쟁은 더 치열해질 거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IT기업 때리기는 그 단초일 수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살려면 미·중 모두가 필요로 하는 나만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 한국 과학기술 성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를 위해 바꿀 것이 있으면 바꿔야 한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August 25, 2020 at 03: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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