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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용어는 먼나라 말](3)쏟아지는 국적불명 용어에 밀려나는 우리말 -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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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학 분야 못쓸 용어들 점점 쌓여
'K영어' 시대에 마구잡이식 외래어 사용

정부 부처들부터 '용어 정비' 필요

국어문화원연합회와 동아사이언스가 추진하는 ‘쉬운 의과학용어 찾아쓰기 자문위원들이 이달 4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왼쪽부터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국어문화원연합회와 동아사이언스가 추진하는 ‘쉬운 의과학용어 찾아쓰기' 자문위원들이 이달 4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왼쪽부터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25년 전부터 한국물리학회에서는 물리학 관련 용어들을 우리말로 순화하는 작업들을 해왔습니다. 대부분이 일본 용어를 베낀 것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말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모여 우리말로 많이 고치려고 상당히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한계를 느꼈습니다."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이달 4일 정오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진행된 국어문화원연합회와 동아사이언스가 추진하는 '쉬운 의과학용어 찾아쓰기' 자문위원 좌담회에서 "순화한 용어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며 상당 부분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며 이 같이 말했다. 지속적으로 용어 순화 노력을 이어왔지만 헛수고를 하는 상황이 반복해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최 교수는 이런 한계의 원인으로 과학자와 언어학자, 그리고 순화한 용어의 활용을 이끌 수 있는 정부 부처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한글물리학회에서 용어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 자연계 학자들 우리말을 잘 모른다는 것"이라며 "우리말에 관심이 있고 나름 우리말을 잘 안다는 분들이 용어 순화 작업에 참여했지만 언어학 전문가의 참여가 절실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와의 또 다른 연결고리가 끊기며 순화한 용어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최 교수는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중고등학교 교재에 쓰이는 용어 등 기본적인 자료가 바뀌어야 하는데 교육부와 교섭하지 못했다"며 "교육부에서 참여하는 분들은 굳건하게 일본말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물리학계에서는 물리학 용어를 학회에서 주도해야지 관료가 개입해서는 되냐는 등의 갈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최 교수는 '쉬운 의과학용어 찾아쓰기' 사업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쉬운 의과학용어 찾아쓰기 사업은 언론에서 흔히 사용되는 과학기술 용어들을  뽑아 이를 순화하는 말을 찾아내고, 의과학자와 대중이 함께 쓰는 용어로 순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최 교수 외에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와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자문위원으로 참여한다.

이 명예교수는 한국물리학회뿐 아니라 대한화학회를 비롯한 과학단체들 대부분 이런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대한화학회는 50년대 초 중반부터 언어문제에 굉장히 신경을 써서 노력을 해왔다"며 "하지만 '이건 안되는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한계를 느낀다"고 말했다. 

대한화학회는 화학 용어를 우리말화해 정리한 화학 술어집을 발간하고 있다. 1952년 우리말화를 위한 술어제정사업에 착수해 화학술어위원회를 두고 술어제정사업을 추진해왔다.  2008년에 발간된 제5개정판이 최신이다. 대한화학회 역시 술어집을 만들며 언어학자들의 전문적인 의견이 필요했다. 이 명예교수는 "과학기술계 사람들은 문이과를 하도 나눠 배워서 우리말 사전지식이 전혀 없다"며 "심하게 말하면 맞춤법도 잘 모르는 정도"라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어 연구기관인 '국립국어원'에 언어학자 참여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재정이나 인력에 여유가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이 명예교수는 "최근 3~4년 전에도 국립국어원과 과학 분야별 용어 온라인 사전을 만들려고 했다가 결국 흐지부지 없어졌다"며 "해당 분야의 배경지식이 없는 국립국어원 관계자가 온라인 사전의 책임자가 되면서 마찰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그런 연결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대한화학회의 화학 술어집 외에도 한국물리학회도 '물리학 용어집', 한국식품과학회는 '식품과학용어집' 등 과학계에서는 용어 순화 노력을 이어왔다. 이 명예교수와 최 교수는 용어·술어집 외에 용어 순화 관련 대중서 및 칼럼 저술 등의 용어 순화 노력을 이어오고 있는 과학기술인들이다. 이들 외에도 과학용어를 순화할 필요성을 느끼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게 두 과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다. 

문제는 학계가 장벽이 높아 사실상 교류가 없다는 점이다. 같은 용어를 두고 물리학계와 화학계, 공학계가 쓰는 용어가 다른 경우도 있다. 이 명예교수는 “과학계 문제는 분야마다 사정이 너무 다르고 장벽이 높다는 게 제일 심각한 문제”라며 “물리하고 화학도 교류가 전혀 없고, 화학과 화공도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원칙이 전혀 다르다”말했다. 그는 과학계에서 용어 순화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야별로 각자 노력이 이어지면서 동력이 모아지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언어학자들은 과학계의 이런 노력들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 용어 순화 문제에 무관심인 줄 알았던 과학계가 적극적으로 관련 노력을 이어왔다는 점에 놀랐다는 것이다. 한글 연구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 그간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권 명예교수는 "인문사회 분야보다 대개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용어가 나타난다"며 "용어 순화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이시는 과학기술인이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권 명예교수는 또 "전공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해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학자로서 고맙다"며 "연과학계의 인식과 의식, 노력이 모든걸 해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의과학 용어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코로나19와 같은 특수한 사태와 함께 회가 복잡해지고 점점 어려운 과학 개념이 필요해지면서 낯선 전문용어가 여과없이 등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권 명예교수는 “예전에는 전문용어가 과학자들이 전문가들 사회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은 바깥으로 나오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며 “방역용어도 이런 사태 없이 방역행정가나 전문가들이 쓰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나오면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권 명예교수는 "정부가 언론에 배포하는 보도자료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와 직결된다"며 "어떤 용어를 알아들으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권리를 알거나 반대로 포기할 수 있는데, 용어를 몰라 범법자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 방역의 경우 국민의 생활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이 명예교수도 "우리 사회에 낯선 개념들이 굉장히 많아지고 있다"며 "녹아들어갈 기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이건범 대표는 침방울을 뜻하는 비말이라는 말을 여과없이 용어가 나타난 예로 들었다. 이 대표는 “비말이란 용어는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때 나왔는데 솔직히 처음엔 뜻을 모르겠더라"며 "침방울과 비말이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고 대처하는 데 차이가 얼마나 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단어든 하나의 말에 모든 걸 담을 수 없겠지만 이전 말도 그런 말이 아님에도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닌지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명예교수는 "입에서 나오는 침방울이 담은 뜻을 생각하면 보이는 침방울로는 공기전파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어 비말과 에어로졸로 구분하다 보니 오히려 우리말이 오염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국적불명의  용어도 난무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 많이 사용되는 용어인 '언택트'를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언택트는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에 부정과 반대를 뜻하는 언(un)을 붙인 신조어로 영어지만 정작 영어권 국가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용어다. 국내에서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간간이 쓰이다 사태가 본격화하며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정부 부처에서는 특허청이 지난 3월 처음 쓰기 시작해 고용노동부, 산업통상자원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여러 부처들이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

최 교수는 "지엽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언택트라는 단어는 영어 사전에도 없는 단어"라며 "정말 이상한 국적불명의 용어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점은 학자로서뿐 아니라 국민의 학사람으로서 참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런 용어들이 'K-영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용어 순화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면서도 순화의 방향에 대한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이 명예교수는 “100% 우리말이어야 한다는 고집은 조금 버렸으면 좋겠다”며 “좋은 외래어 자체를 우리말화하는 것은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말이나 언어의 해외 유입을 차단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최무영 교수는 “새로운 개념이 나오고 말이 만들어지면 어차피 조어를 해야 하는데 토박이말로 조어하는게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권 명예교수는 '쉽게'라는 대원칙만 확실하면 여러 방식을 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권 명예교수는 “첫 조건은 쉽게지만 쉽게가 사실 매우 어렵다”며 “정확한 개념이 담길 수 있을 정도의 쉬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쉬운 한자말을 활용해도 폭이 넓어진다”며 “쉬운 한자말은 쓰고 매우 익숙한 외래어는 받아들이는 것처럼 필요할 때 가져다 쓰는건 우리말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명예교수는 바꾼 용어가 읽고 쓰는 면에서도 쉬워야 함을 강조했다. 권 명예교수는 “어떤 용어든 순화에 성공하는 이유가 길이”라며 “원어가 네 음절인데 다섯 여섯 음절로 길어지면 무조건 실패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오래 그런 방식으로 순화해 5만 단어를 강제로 순화했지만 성공한 단어는 2만 단어에 불과했다”며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북한과 같은 사회에서조차 국민이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무영(오른쪽)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4일 정오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부대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최무영 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최무영(오른쪽)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4일 정오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부대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최무영 교수.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정부가 외국어나 외래어 등 낯선 용어들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이전인 박근혜 정부 때도 낯선 용어들이 보도자료에 너무 잦게 등장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한글문화연대는 2013년 4~6월동안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 대법원이 냈던 보도자료 3068건을 모아 분석했는데, 보도자료 1건마다 평균 2.88회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어 기본법 14조 1항에 따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

다음해인 2014년 4~6월에는 국어 기본법 위반이 보도자료 1건당 평균 3.28회로 더 늘었다. '플랜트'와 '엑셀러레이터', '웨어러블' 등 외국어 낱말을 우리말로 바꾸지 않고 한글로만 표기한 경우도 다수였다. 

전문가들은 결국 낯선 용어의 남용을 막기 위해선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각 부처에서 전문적으로 할만한 동력이나 동기를 갖고있지 않는 것 같다”며 “총괄위원회 같은 곳에서 각 부처와 협력해 전문가, 산업계, 공무원, 국어학자들을 모아 연구작업 하고 말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명예교수는 "국무총리실에 각 부처를 평가할 때 기준에 정책용어에 외래어를 쓰는 것에 대한 언어 문제 넣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각 부처에서 '안 그래도 할일이 많다'며 반발이 일어 못했다고 한다"며 "행정기관에서는 예산 문제 말하는데 각자 표준화 심의기구가 있는 만큼 그것만 잘 활용해도 충분히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August 30, 2020 at 07: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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